작가노트

슬퍼해도 되고, 기뻐해도 된다

내가 어디에서 작업의 영향을 받았는가 묻는다면, 그 시작은 남편의 한마디였다.
“슬퍼해도 되고, 기쁠 때 기뻐해도 된다.”

나는 오랫동안 울지 말라, 슬퍼하지 말라는 말에 길들여져 있었다. 그래서 눈물이 나도 소리 내어 울지 못하고, 기쁨조차 조심스레 숨기며 살아왔다.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늘 허용되지 않는 것 같았고, 그렇게 타인의 기준 속에서 나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의 그 말은 내 안의 단단한 족쇄를 풀어주었다. 나는 처음으로 슬픔을 있는 그대로 슬퍼하고, 기쁨을 있는 그대로 기뻐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나는 나 자신을 온전히 인정할 수 있었고, 타인의 틀에서 벗어나 나에게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래서 나의 작업에는 모든 감정이 새겨진다. 기쁨도, 슬픔도, 두려움도, 기다림도. 그것들은 더 이상 감추어야 할 것이 아니라, 삶을 이루는 결이자 흔적이다. 나무껍질이 겹겹이 쌓여 나무를 단단하게 하듯, 내 감정의 결 또한 쌓이고 겹쳐 나를 만들고, 그것이 곧 내 작업의 뿌리가 된다.

아주 사적인 색

우리는 모두 흰 결로 태어납니다.
시간이 흐르며 그 위에 수많은 감정들이 겹겹이 스며듭니다.

어떤 감정은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어떤 기억은 오래도록 흔적을 남깁니다.

그렇게 나는 나만의 색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그 결 위에는 내가 살아낸 시간들이 분명히 새겨져 있습니다.

<아주 사적인 색>은
누구에게도 똑같을 수 없는,
각자의 시간, 감정, 존재의 깊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콜라주

겹겹이 쌓이는 감정과 경험의 층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과정입니다.

한지를 아크릴 물감으로 조색해 물들인 후, 불에 태우고 찢고, 다시 덧붙이는 행위를 반복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삶이 우리에게 남기는 흔적들, 기억과 감정의 켜켜이 쌓인 결을 화면 위에 새깁니다.

불규칙하게 생긴 결, 찢긴 자국, 태워진 테두리, 겹쳐 붙이면서 생기는 미묘한 단차들은 기계적으로 반복하거나 재현할 수 없는 유일한 흔적이 됩니다. 이렇듯 저는 반복된 행위를 통해 누구도 복제할 수 없는, 살아 있는 감정의 회화를 만들고자 합니다.

작품은 이미지가 아니라 경험의 흔적이고, 다시 그릴 수 없는 존재의 궤적입니다.

작업방식

작업은 자연, 특히 나무껍질이 갈라지고 단단해지며 성장하는 모습에서 영감을 받는다. 나무껍질이 기록해 온 단단함과 성장의 역사를 한국의 전통 재료인 한지를 통해 구현한다. 한지를 염색하고 찢고 태워서 캔버스에 부착하는 독창적인 기법은 단순한 평면을 넘어선 입체적인 조형성 을 부여하며, 이 거친 질감과 깊은 단차는 시간을 견뎌낸 내면의 강인함을 상징한다.

이러한 작업은 나의 내면의 서사이기도 하다. 나는 타인의 시선이라는 껍질 속에 숨어왔지만, 이제 그 낡은 껍질을 내려놓는 과정 속에 있다. 작품 속 나무껍질처럼 갈라지고 태워진 흔적들은 슬픔, 두려움, 행복 등 삶에서 겪는 모든 감정의 축적이며, 나는 이 모든 경험들이 억지로 숨길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완전하며 아름답다는 진실을 발견했다.

나는 감정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지 않으며 ‘나만의 색’을 알아가는 여정을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갈 것이다. 작품 속에 드러나는 다양하고 미묘한 색채들은 나 자신의 고유한 빛인 동시에, 세상 모든 존재가 지닌 본질적인 색깔을 상징한다. 궁극적으로 나의 작업이 관람객들과 내면의 성장을 나누는 거울이 되어, 자신의 모든 감정적 경험들을 긍정하며 각자만의 색을 충실히 채워 나가기를 응원한다.

경험의 수피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모두 그 시간을 몸에 새기며 살아간다.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생각과 감정이 스쳐 지나가고, 어떤 것은 사라지지만 어떤 흔적은 오래 남는다.

그렇게 남은 것들이 겹겹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든다.

어느 날 나무의 수피를 바라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용히 갈라지고 거칠어지며 단단해져 가는 그 표면이 시간 속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다는 것을.

작업을 이어가는 동안에도 수많은 감정이 스쳐 지나간다.
어떤 날은 막막함 속에서 손이 멈추기도 하고, 어떤 날은 몰입 속에서 밤을 새우기도 한다.

그렇게 지나간 감정과 일상의 경험들은 사라지지 않고 흔적을 남긴다. 색이 되기도 하고, 질감이 되기도 하며 작품 속 결의 형태로 스며든다.

작업은 한지 위에 색을 올리고, 태우고, 다시 덧대는 과정을 반복하며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결, 그을림, 그리고 층위의 흔적들은 단순한 재료의 변화가 아니라 시간을 지나온 경험의 흔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하나의 작품은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라기보다 시간 속에서 지나온 감정과 경험이 축적된 하나의 표면에 가깝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무게

효율적이고 눈에 보이는 것들보다 형태나 결과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비효율적인 것들이 삶을 더 풍요롭고 가치 있게 만든다.

나의 예술가로서의 여정도 그러하다. 내가 노력한 시간, 독서, 재료, 작업 방식,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관은 눈에 보이는 결과로 드러나지 않거나, 당장 효율적으로 삶에 보탬이 안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축적되고, 내 안에, 내 작품에 쌓인다. 나의 세계관도 점차 탄탄해진다. 그리고 나의 삶의 방식이 바뀌고 내 안에서 삶에 대한 마음가짐이 바뀔 정도로 변화가 일어난다. 삶이 좀 더 풍요로워지고 가치 있어진다. 더 나아가 그런 나의 마음을 반영한 세계관을 작품에 담아 관객에게, 타자에게 작품으로서 다가가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새로운 시각으로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경험을 주고 싶기에 즐겁다.

효율과 눈에 보이는 것들에서 벗어나 각자의 낭만을 하나쯤은 만들어 가길 바란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이 들더라도 자신의 뜻을 쉬이 꺾지 않고 계속 해나가는 것, 처음 들어선 길을 계속 가는 것. 좋아하는 마음은 무언가를 시작하게 하지만, 그 일이 끝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좋아하는 마음 이면의 지속하는 마음도 돌아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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